당산 이쁜이를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이 책 진짜 두꺼운데 하루 만에 다 읽었어!"라며 자신있게 양귀자 장편소설을 추천했다.
600페이지.. 생각보다 많이 두껍지만 이전 양귀자 소설을 읽고 반한 나는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양귀자 작가가 펼쳐내는 세상을 한번 더 들여다보고 싶기 때문이다.

책 소개
쓸쓸한 시대를 통과하는 우리들의 주문, 잘가라 밤이여
상처와 절망으로 얼룩진 〈나성여관〉에서 희망을 말하다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양귀자 소설의 재미와 감동
작가 양귀자가 1990년 발표한 첫 장편소설. 1986년, 연작소설 『원미동 사람들』로 80년대 한국 사회의 척박한 시대 지형을 놀랍도록 세밀하게 그려내 주목을 받았던 작가가 처음으로 펴낸 장편소설이다. 90년 초판의 제목은 『잘가라 밤이여』였으나 다음 해 『희망』으로 제목을 바꾸어 재출간했다. “잘가라 밤이여”의 은유에서 벗어나 명료하게 “희망”으로 가고 싶다는 작가의 뜻을 반영했다.
이 소설은 특히 작가 고유의 연민과 따스한 시선이, 그리고 양귀자 특유의 활달하고 서슴없는 문체가 휘몰아치는 시대의 거칠고 황량한 삽화들을 어떻게 이야기로 보듬어 완성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어 양귀자의 문학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지표가 된다.
-출처 : 교보문고
책 리뷰
양귀자 작가의 『희망』은 서울의 어느 허름한 여관집 아들로 살아가는 대학입시 삼수생, 우연이의 시선을 따라 전개된다. 주인공 우연이의 따뜻하고 인간적인 시선은 독자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공감하게 만든다. 그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마음 한켠에서 의문이 피어오르기도 하지만, 결국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모두 양면성을 지니고 있다. 우연이의 내면 역시 그 양면성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그것이 너무도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그래서일까요. 그의 행동 하나하나가 낯설지 않고, 때론 나 자신을 보는 듯해 깊은 공감이 생긴다.
양귀자 작가의 문장은 강한 몰입감을 준다. 섬세한 표현과 낯설지만 강렬한 단어 선택은, ‘이런 표현도 가능하구나’, ‘이 단어는 무슨 뜻이지?’ 하는 생각과 함께 제 부족한 어휘력을 일깨우기도 한다. 작가의 글을 읽으면서 나는 나의 일상 언어에 대해, 나의 표현 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반성과 감탄이 교차하는 순간들 속에서 양귀자 작가는 단 두 권의 책만으로 나의 가장 애정하는 작가가 되었다.
이제 남은 그녀의 책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반갑고 설렌다. 동시에, 아직 그 책들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못내 아쉽고 안타깝기도 하다.

이 계절이 싫다.
이 분홍의 햇볕과 연록의 잎사귀와 옥색 하늘의 짱짱함이 싫다.
너무나 단조로운 내 삶의 무대에 4월은 어울리지 않은 소도구이다. 나는 하루하루를 죽일 수 없어 거의 미칠 지경이었다.
이토록 예쁘게 표현해 놓고도 봄이 싫다니… 나는 봄이 제일 좋은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 나를 너무나도 설레게 하는 계절. 이 계절은 나에게 설렘을 안겨주는 계절인데. 우연이는 싫어한다. 그런데 '이 분홍빛 햇살과 연둣빛 잎사귀, 옥색 하늘의 쨍쨍함이' 라고 말하며 그렇게나 아름답게 봄을 표현하는 우연이. 그럼 우연이가 좋아하는 계절은 언제일까? 단조로운 우연이의 삶. 어느 계절이 과연 단조로울까? 사계절 모두가 반짝반짝 자기 주장이 강한데.히히

누나가 두고 간 편지는 나한테 그대로 칼이었다. 편지는 딱 두줄이었다.
'집을 떠나기로 결심했단다. 다시 만날 때까지 계속 네가 보고 싶을 거야.'
그렇게 누나는 떠났다. 누나는 정말 그날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돌아오지 않았다. 백화점에서는 오히려 집으로 전화를 걸어 누나의 행방을 물었다.
결국, 우연이의 누나는 집을 나갔다. 여자가 집을 나가면… 도대체 어디로 간 걸까. 온갖 상상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내가 우연이라면, 아마 하루도 참지 못하고 미친 듯이 누나를 찾아 헤맸을 것이다. 우연이는 누나를 정말 많이 좋아하니까.
그리고 예전이나 지금이나, 여자의 가출은 너무나 위험하다. 세상엔 나쁘고 어두운 곳이 많고, 그런 길로 빠지기 쉬우며 유혹도 많다. 더구나 우연이의 누나는 이미 좋지 않은 관계를 시작했었다. 그래서 내 상상은 자꾸만 나쁜 쪽으로만 뻗어나간다.
제발… 내가 떠올리는 최악의 상황만은 아니길..

"걱정일랑 조금도 하지 마세요. 저희도 최대한 연대하고 투쟁해서 재판에 영향을 미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그렇게 될 거예요. 도연 씨는 징역을 살아도 몸만 갇히지 정신까지 같히진 않아요. 도덕적으로 도연 씨는 무되에요. 부모님께선 납득하시기 어렵겠지만, 그는 정말 큰일을 해냈어요. 우리가 용기라고 부르는 그것에 참다운 값을 해낸 거예요. 절대 주눅 들지 마세요. 절대로요"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아들의 잘못이 아니라고. 그는 아무 잘못도 하지 않았다고. 그 말을, 홍정미가 대신해주었다. 엄마에게 그는, 당연히 믿고 아끼는 존재였고,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첫사랑 같은 첫째 아들이었다. 그런 엄마 입장에서는 아들이 누군가를 죽였다는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혹여 그 일이 사실이라 해도, 그게 잘못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다른 누군가의 입을 통해 듣고 싶었을 테고.
하지만 정말 살인은 잘못이 아닌 걸까? 아니다. 안중근 의사처럼 전쟁 중의 정당한 행위가 아니었고, 이건 분명 민간인을 죽인 일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 수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속이고,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그 누구에게도 허락되어선 안 된다.

되풀이되는 시대의 비극을 막기 위해선 명확한 마친표가 필요하다고 나는 믿는다. 그래서 내가 나섰다. 그 길만이 임용출, 그자와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값을 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이제 이 시대의 번제물이 되어야 한다. 그와 내가 함께 제단에 놓여 불태워져야 한다. 나는 쌍둥이들이 느끼는 형제애를 동시대를 산 그에게서 느꼈다.
되풀이되는 시대의 비극을 막기 위해, 그를 죽이는 방법밖에 없었을까? 정말 다른 길은 없었을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충분히 생각했고, 지금도 계속 고민 중이지만 아직도 확신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이 질문을 계속 붙잡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고문하고, 괴롭히고, 짓밟았던 사람들은 여전히 편하게 살아가는데, 그런 고통을 당했던 사람들은 지금도 힘겹게 살아가고 있다. 이건 분명 잘못된 일이다.
아직 늦지 않았다. 과거에 사람들을 그렇게나 잔인하게 괴롭히고 고통 준 이들이,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도록 하는 방법을 우리는 그 방법을 끝까지 찾아야 한다.

아이들은 큰고모는 굳이 붙잡지는 않았다. 문득 홍정미가 해준 말이 떠올랐다. 이름 붙은 날이나, 아니면 자기들 내킬 때만 떠들썩하게 찾아와 아이들 마음에 바람만 넣는 자선가들 때문에 일부러 한적한 시골을 찾아간 것이라던. 성치 않은 몸의 아이들은 스스로 일어설 생각보다 언제 올지 모를 예기치 않은 손님들을 기다리며 외로움부터 배운다고.
“언제 올지 모를 예기치 않은 손님들을 기다리며 외로움부터 배운다.” 이 문장은 내 마음을 깊이 아프게 했다.
교생실습 때 만났던 아이들이 떠올랐고, 그 아이들의 해맑게 웃던 얼굴과 실습 마지막 날, 이별 앞에서 슬퍼하던 표정이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특수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했다. 우리 반에는 여섯 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그중 한 명은 ‘네’ 정도만 말할 수 있는 민구보다도 지적 수준이 낮은 학생이었다. 처음에는 그래서 이별의 의미를 잘 모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실습 마지막 날, 그 아이는 누구보다 이별을 잘 알고 있는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슬픔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그 아이에게 내가 유독 마음이 많이 갔던 이유는, 그 아이가 자라고 있는 환경 때문이었다. 시설에 거주하며, 민구처럼 다른 학생들과 함께 지내는 삶. 늘 누군가를 기다리며, 늘 누군가와의 이별을 겪어내야 하는 그런 환경 속에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언제 올지 모를 예기치 않은 손님들을 기다리며 외로움부터 배운다”는 문장은 단순한 문장이 아니었다. 그 아이들의 삶 자체를 설명하는 말 같았다. 그래서 이 문장은, 나를 너무 아프게 했다.

양귀자의 「희망」은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 자신에 대해, 내가 생각하는 바른 삶이란 무엇인지, 어떤 선택이 옳은지, 그리고 각자가 살아가는 방식에 대해 되짚어보게 만든다.
우연이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을 마주하게 되고, 그들이 품고 있는 희망을 상
상하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게 된다.
작가는 어떤 정답도 직접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독자가 스스로 다양한 관점에서 삶을 바라보도록 만든다. 나 역시 나성여관의 인물들을 통해 내 삶을 돌아보게 된다. 모두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선택을 한다. 누나는 가출을 통해, 형은 세상의 변화를 위해, 노인은 북에 대한 그리움을 담아, 아저씨는 부인을 향한 사랑으로, 민구는 모두의 행복을 바라며 움직인다.
삶에는 정답이 없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끊임없이 나의 미래에 대해, 내가 진정으로 꿈꾸는 희망이 무엇인지 고민해봐야겠다. 그리고 나성여관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나만의 희망이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더 깊이 생각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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